다케다 신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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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다 신겐은 가이 국의 다이묘로, 16세기 일본 전국 시대의 유력한 무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하루노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1559년 불교 승려가 되어 신겐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는 '가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그의 주요 라이벌은 '에치고의 용'으로 불린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두 사람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여러 차례 격돌했다.
다케다 신겐은 1521년 가이 국에서 태어났으며, 1541년 아버지를 추방하고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그는 시나노를 평정하고 고소슨 삼국 동맹을 맺었으며, 이마가와, 호조 가문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572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따라 상경을 시도했지만,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지병으로 사망했다.
다케다 신겐은 뛰어난 군사 전략과 행정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정책과 군사 시스템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가신들은 도쿠가와 가문에 귀순하여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에 기여했다. 다케다 신겐은 1915년 종삼위로 추증되었으며, 그의 삶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재해석되어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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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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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봉사 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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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케다 노부토라 |
어머니 | 오이노 가타 |
형제 | 다케다 다케마쓰 다케다 노부시게 다케다 노부카도 다케다 노부자네 이마가와 요시모토 (처남) 아나야마 노부토모 (처남) 마쓰오 노부코레 다케다 무네토모 가와쿠보 노부기네 이치조 노부타쓰 다케다 노부토모 다케다 가쓰토라 조케이인 난쇼인 네네 케코인 키쿠고료닌 가메고료닌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의 부인 |
배우자 | 우에스기노 가타 산조노 가타 |
측실 | 스와 고료닌 네즈 고료닌 아부라카와 부인 |
자녀 | 다케다 요시노부 운노 노부치카 다케다 노부유키 오바이인 겐쇼인 다케다 가쓰요리 신류인 니시나 모리노부 가쓰라야마 노부사다 다케다 노부키요 마쓰히메 기쿠히메 |
군사 활동 | |
주요 전투 | 운노구치 전투 세자와 전투 우에하라 성 포위전 구와바라 성 포위전 후쿠요 성 포위전 안코쿠지 전투 나가쿠보 포위전 다카토 성 포위전 (1545년) 류가사키 포위전 오다이하라 전투 시카 성 포위전 우에다하라 전투 시오지리토게 전투 가쓰라오 성 포위전 가와나카지마 전투 간노미네 포위전 마쓰오 성 포위전 무사시-마쓰야마 성 포위전 (1563년) 미노와 성 포위전 하치가타 성 포위전 (1568년) 오다와라 포위전 (1569년) 미마세토게 전투 도네가와 전투 미카타가하라 전투 노다 성 포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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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다케다 신겐은 어릴 적에 "타로"(太郎) 또는 '''가쓰치요'''(勝千代)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원복(元服, 성인식)을 치른 후에는 '''하루노부'''(晴信)라는 정식 이름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이름 한 글자를 받은 것이다. 봉건 시대 일본에서는 상급 무사가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하급 무사에게 주는 것이 흔한 관례였다.
아시카가와 다케다 가문 모두 미나모토 씨족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하루노부는 공식적으로 미나모토 성을 사용했다. 조정으로부터 ''다이젠 다이부''(大膳大夫, 궁중 음식을 담당하는 관직)라는 관직을 받았을 때, 공식 기록에는 "미나모토노 하루노부"(源 晴信)로 기록되었다.
1559년 2월, 하루노부는 불교에 귀의하여 '''신겐'''(信玄)이라는 법명을 받았다.[2] 신겐(信玄)이라는 한자는 '노부하루'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이름 하루노부(晴信)의 순서를 바꾼 것이다. 법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공식 이름은 평생 하루노부였다.
신겐은 전장에서의 용맹함으로 인해 흔히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고 불렸다.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에치고의 용"(越後の龍) 또는 "에치고의 호랑이"(越後の虎)로 불렸다. 신겐과 겐신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며 숙명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3]
신겐은 가이 국의 다이묘였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 노부토라를 도와 가문의 일에 참여하며 능력을 보였다.
1541년, 신겐은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 국으로 추방하고 가문의 가독을 계승했다. 이 사건으로 노부토라는 사위인 스루가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감시 아래 은거하게 되었으며,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간의 동맹이 맺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 이 쿠데타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가이슈고
1521년 음력 11월 3일, 가이국 수호 다케다 노부토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서군(西郡)의 유력 국인(国人) 다이이씨(大井氏)의 딸 다이이 부인(大井の方)이다. 아명은 타로(太郎)였으나[34], 『고요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신겐 탄생 시기 다케다 가문의 승리를 기념하여 '''가쓰치요'''(勝千代)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신겐은 후대에 영웅시되면서 여러 탄생 설화가 만들어졌다.신겐의 출생지는 쓰쓰지가사키 관(躑躅ヶ崎館)에 부속된 요새로 알려진 요가이 산성(要害山城)이다(또는 세키스이지(積翠寺)). 당시 아버지 노부토라는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우지치카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1521년 10월 이마가와 가신 후쿠시마 마사나리가 이끄는 군대가 고후를 압박했다. 노부토라는 고후 근교의 이이다가와라 전투(飯田河原の戦い)에서 후쿠시마 군을 격퇴했으며, 이때 임신 중이던 다이이 부인은 요가이 산성으로 피신하여 신겐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신겐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노부토라는 가이국 통일을 거의 달성한 상태였다. 증조부 다케다 노부마사 시대부터 수호대(守護代) 아토베씨(跡部氏)를 멸망시키는 등 국내 세력을 복속시키며 통일을 진행했고, 노부토라 대에 이르러 가이 통일을 완수하고 1519년 고후에 쓰쓰지가사키 관을 본거지로 삼아 조카마치(城下町)를 건설했다. 이를 통해 가신단 조직이 정비되고 센고쿠 다이묘로서 다케다 가문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1523년, 4살 위의 형 다케다 다케마쓰가 7세로 요절하면서 신겐(당시 타로)이 적자가 되었다.[34] 1525년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가 태어나자, 『고요군칸』에 따르면 아버지 노부토라의 총애는 노부시게에게 옮겨갔고, 신겐은 점차 소홀히 여겨졌다고 한다. 신겐의 후견인(傅役)은 명확하지 않으나, 『고요군칸』은 이타가키 노부카타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쓰치야 마사쓰구의 아버지 가네마루 지쿠젠노카미(金丸筑前守)도 후견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노부토라 후기에는 스루가의 이마가와씨와 화친했지만, 간토 지방에서는 사가미국의 신흥 세력 후호조씨(後北条氏)와 대립하던 센가쿠 우에스기씨(扇谷上杉氏)와 동맹을 맺고, 영지가 접하는 가이 쓰루군(都留郡)에서 호조 측과 항쟁을 벌였다.
덴분(天文) 2년(1533년), 아버지 노부토라의 정략에 따라 센가쿠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딸(혹은 우에스기 아사오키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부부 사이는 좋았다고 전해지나, 1534년 부인은 출산 중 아이와 함께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32]
덴분(天文) 5년(1536년) 3월, 신겐은 원복(元服)을 치르고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로부터 이름 한 자(헨키, 偏諱)를 받아 '''하루노부'''(晴信)로 개명했다.[35] 관위는 종오위하 대선대부(大膳大夫)에 서임되었다. 같은 해, 이마가와 우지테루 사후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을 거쳐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가독을 계승하면서 다케다 가문과 화친하게 되었다. 이 시기 요시모토의 알선(혹은 교토 공가(公家)와의 관계가 깊은 이마가와 가문의 주선)으로 교토의 좌대신(左大臣)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딸(산조 부인)을 계실(継室)로 맞이했다. 『고요군칸』은 이 혼례와 하루노부의 성인식 및 관위 서임 모두 이마가와 가문의 주선이었다고 기록하지만, 가독 상속 직후 요시모토와 노부토라의 동맹 관계가 불명확했던 시점이라 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같은 해, 하루노부는 시나노국 운노쿠치 성(海の口城)의 성주 히라가 겐신(平賀玄信)을 공격하며 첫 출진을 경험했다.
1541년, 하루노부가 21세 되던 해, 가신단의 유력 인물들인 이타가키 노부카타, 아마리 도라야스, 오부 도라마사 등의 추대를 받아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추방하고 다케다 가문의 제19대 당주 자리를 계승했다. 노부토라 추방의 이유로 후세 사료에는 그의 폭정이 기록되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계속된 전쟁과 국내 영주 세력 통제를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이 가신들의 반발을 샀을 가능성이 있다. 하루노부의 가독 상속은 가이 영민들에게 환영받았다고 전해진다.
2. 2. 추방과 가독 상속
덴분 10년(1541년) 6월, 우미노다이라 전투에서 고후로 귀환한 직후, 하루노부는 중신인 이타가키 노부카타, 아마리 토라야스, 이이토미 토라마사 등과 공모하여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추방했다. 『고하쿠사이기』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일종의 무혈 쿠데타였으며, 이로써 하루노부는 다케다 가문의 19대 당주 자리를 계승하였다. 추방된 노부토라는 사위인 스루가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감시 아래 강제적인 은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다케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동맹이 맺어졌다.[1]노부토라 추방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노부토라가 하루노부 대신 차남 노부시게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양군감』에는 덴분 7년(1538년) 정월 축하연에서 노부토라가 하루노부에게는 술잔을 주지 않고 노부시게에게만 주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들(『카츠야마키』, 『시오야마 코우가쿠젠안 소넨다이키』 등)에서는 노부토라의 대외 침략으로 인한 과도한 군역과 흉작에도 불구하고 부과된 중과세 등 이른바 '악행'을 추방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또한, 히라야마 유는 당시 이웃 나라의 경제 제재와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국내에서 '대대적인 덕정(徳政)'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하루노부가 이에 부응한 결과라고 주장한다.[36] 하지만 노부토라의 정책이 가이 통일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36]
최근에는 신겐이 초기에는 노신들의 꼭두각시였으며, 아버지 추방은 가이 국 유력 영주들의 쿠데타였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 설의 근거 중 하나로 신겐의 첫 출전 시기가 센고쿠 다이묘로서는 이례적으로 늦다는 점(학설상 20세)이 거론된다.
한편, 노부토라 추방 직후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신슈 사쿠군을 빼앗기기도 했다.
2. 3. 시나노 평정
아버지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추방한 직후인 1541년, 시나노의 스와 우에하라성 성주 스와 요리시게와 시나노 슈고(信濃守護)이자 하야시성 성주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가이로 쳐들어왔으나, 하루노부(신겐)는 이를 격퇴했다.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시나노 침공 노선을 변경하여, 하루노부는 시나노 스와령으로의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1542년 6월, 하루노부는 스와 가문의 내부 분쟁에 개입했다. 스와 종가를 두고 다투던 스와 요리시게와 다카토 요리쓰구 중, 하루노부는 다카토 요리쓰구와 손을 잡고 스와 요리시게를 공격했다. 쿠와하라 성 전투에서 스와 요리시게는 화의를 요청했으나, 하루노부는 그를 고후로 연행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스와령을 제압했다[38]. 그러나 같은 해 9월 25일, 스와령 분할 문제로 다카토 요리쓰구와 대립하게 되자, 하루노부는 미야가와 전투에서 다카토 군을 격파하고 스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하루노부는 시나노 중부 및 남부로 세력을 확장했다. 1543년에는 나가쿠보성 성주 오이 사다타카를 공격하여 자결시켰고, 1545년 4월에는 가미이나(上伊奈)의 다카토성을 공격하여 다카토 요리쓰구를 멸망시켰다(타카토 합전). 이어 6월에는 후쿠요성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를 추방했다.
1547년, 하루노부는 간토 간레이 세력의 지원을 받는 시가성의 가사하라 기요시게를 공격했다. 고즈케(上野)의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원군을 보냈으나, 다케다 군은 8월 6일 오타이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가사하라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루노부는 항복한 적병 약 3,000명을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노예로 삼는 등 가혹하게 처리했다. 이 사건으로 시나노 영주들은 하루노부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시나노 평정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같은 해 하루노부는 분국법인 《고슈 법도지 시다이》(신겐 가법)를 제정하여 영지 지배 체제를 정비했다.
1548년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 북부의 강자인 가쓰라오성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격돌했다. 병력에서 우세했음에도 다케다 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타가키 노부카타, 아마리 도라야스 등 핵심 중신들을 포함한 많은 장병을 잃었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을 입어 유무라 온천에서 30일간 요양해야 했다. 이 틈을 타 4월에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스와를 침공했지만, 하루노부는 7월 시오지리고개 전투(가쓰겐고개 전투)에서 오가사와라 군을 크게 격파하며 위기를 넘겼다.
1550년 7월, 하루노부는 마쓰모토 분지의 오가사와라 령으로 진격했다. 니나카 모리요시가 다케다 측에 내통하면서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저항할 힘을 잃고 하야시성을 버린 채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로 도주했다(하야시 성 전투). 이로써 나카시나노(中信濃) 지역이 다케다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기세를 몰아 9월에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인 도이시성을 공격했으나, 이 전투는 후대에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 불릴 만큼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다케다 군은 요코타 다카토시, 오야마다 노부아리를 비롯한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1551년 4월, 사나다 유키타카(사나다 유키쓰나)의 책략으로 도이시성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다시 다케다 측에 유리하게 돌아섰다. 1552년 8월에는 고이와다케성을 공략했다. 마침내 1553년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거성인 가쓰라오성마저 포기하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탁하여 도망쳤다(가쓰라오 성 전투). 이로써 히가시시나노(東信濃) 지역까지 다케다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하루노부는 북부 시나노를 제외한 시나노 대부분 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하면서, 시나노의 패권을 둘러싼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간의 오랜 싸움, 즉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2. 4.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3년 음력 4월, 시나노에서 쫓겨난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북부 시나노 호족들의 요청을 받은 에치고의 영주 나가오 가게토라(훗날의 우에스기 겐신)는 군대를 이끌고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하였다. 이로써 젠코지다이라(善光寺平)의 지배권을 둘러싼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간의 오랜 싸움, 즉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3년): 음력 4월, 가게토라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시나노로 진격했다. 다케다 군은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거점이었던 가쓰라오 성을 함락시켰으나, 5월 하치만 전투에서 패배하여 성을 다시 빼앗겼다. 9월에는 다케다 군이 시오타 성을 함락했지만, 후세 전투에서는 선봉대가 패배했다. 우에스기 군은 아라토 성, 콕쿠조산 성 등을 함락하고 아오야기 성, 카리야하라 성을 공격했으나, 신겐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결국 양측은 결정적인 전투 없이 5월에 군대를 물렸다. 같은 해 8월, 가게토라의 지원을 받은 오이 노부히로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겐에게 즉시 진압되었다.
- 고소슨 삼국 동맹 (1554년): 나가오 가게토라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신겐은 이마가와 요시모토, 호조 우지야스와 동맹을 추진했다. 1554년 봄, 장남 다케다 요시노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과 혼인하여 이마가와 가문과 동맹을 맺었고, 자신의 딸을 호조 우지야스의 장남 호조 우지마사에게 시집보내 호조 가문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마가와 가문 역시 다케다 가문의 중개로 호조 가문과 동맹을 맺으면서 가이, 사가미, 스루가 세 가문 간의 고소슨 삼국 동맹이 성립되었다.
-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5년): 음력 4월,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다시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했다(사이 강 전투). 하지만 이번에도 큰 전투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재로 음력 10월에 화친하고 양측은 철수했다. 신겐은 나가오 군이 철수하자마자, 가게토라에게 의지하며 저항하던 기소 요시야스, 기소 요시마사 부자를 공격하여 굴복시켰고,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세력을 넓혔다.
-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57년): 나가오 가게토라가 다시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하여 양군이 대치했다(우에노하라 전투). 그러나 이번에도 별다른 교전은 없었으며, 가게토라의 본거지인 에치고에서 잇코잇키가 일어나자 나가오 군은 철수했다.
-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61년): 1559년 음력 5월 출가하여 '신겐'이라는 법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다케다 하루노부는 1561년 음력 9월 10일, 다시 우에스기 마사토라(나가오 가게토라가 개명한 이름, 훗날의 우에스기 겐신)와 가와나카지마에서 격돌했다(하치만바라 전투). 이 전투는 다섯 차례의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 가장 격렬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다. 다케다 군은 2만, 우에스기 군은 1만 3천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양측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시게를 비롯하여 모로즈미 도라사다, 야마모토 간스케, 사에구사 모리나오 등 핵심적인 장수들을 다수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4] 전투 중 우에스기 겐신이 직접 말을 타고 다케다 군 본진으로 돌격하여 칼로 신겐을 공격했고, 신겐은 이를 군배(철선, 鉄扇|텟센일본어)로 막아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1564년): 마지막으로 1564년에도 양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했으나(시오자키 대진), 이번에도 직접적인 충돌 없이 끝났다.
이 다섯 차례의 전투는 대부분 결정적인 승패 없이 소규모 접전이나 대치로 끝났으며, 양측 모두 전력을 다한 총력전은 피하는 양상이었다. 가와나카지마에서의 오랜 싸움 이후, 신겐은 주력 공격 방향을 고즈케 방면으로 전환하게 된다.
2. 5. 이마가와, 호조 가문과의 관계
1554년 봄, 나가오 가게토라에 대항하기 위해 신겐(당시 하루노부)은 장남 요시노부의 정실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레이쇼인)을 맞이하여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강화했다(고슌 동맹). 또한 자신의 딸(오바이인)을 호조 우지야스의 장남 호조 우지마사에게 시집보내 고호조씨와도 동맹을 맺었다(고소 동맹). 이마가와씨 역시 다케다 가문의 중개로 호조씨와 혼인 동맹을 맺었는데, 이를 고소슨 삼국 동맹이라고 한다. 이 동맹은 특히 북관동에서 우에스기 겐신과 대립하던 호조씨와의 관계에서 군사 동맹으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1560년 음력 5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동맹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사망하자 이마가와 가문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신겐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이마가와 가문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 침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적자 다케다 요시노부는 이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신겐은 스루가 침공에 대한 내부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1565년 요시노부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를 할복시키고, 1567년 음력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아갔다(병사설도 있음).[3]
1568년 음력 12월, 신겐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력하여 스루가 침공을 개시했다. 이마가와 군의 저항을 격파하고 이마가와야카타에 입성했으나, 이마가와씨와 친척 관계였던 호조 우지야스가 이마가와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 게다가 스루가 정복을 함께 계획했던 이에야스마저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신겐을 적대하자, 신겐은 호조-도쿠가와 연합군과의 싸움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1569년 음력 4월 가이로 일단 군대를 철수시켰다.
같은 해 음력 9월, 신겐은 2만 대군을 이끌고 호조씨를 압박하기 위해 고즈케국, 무사시국, 사가미국으로 침공했다. 다키야마성과 하치가타성을 공격하고, 음력 10월 1일에는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으나 4일 만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호조 우지테루와 호조 우지쿠니가 이끄는 호조 군이 퇴각로를 막으려 했으나, 음력 10월 8일 미마세 고개 전투에서 다케다 군이 호조 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4] 이 승리로 호조씨를 제압한 신겐은 1570년 음력 7월, 다시 스루가를 침공하여 완전히 평정하고 다케다 가문의 영토로 확보했다.
1571년 음력 10월 3일, 호조 우지야스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호조 우지마사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우에스기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케다 가문과 다시 화친하기로 결정했다. 우지마사는 동생 호조 우지타다와 호조 우지노리를 인질로 가이에 보내고, 같은 해 음력 12월 27일 신겐과 다시 고소 동맹을 맺었다. 이 시기 다케다 가문의 영토는 가이 외에도 시나노국, 스루가국, 고즈케국 서부, 도토미국, 미카와국, 히다국, 엣추국 일부에 걸쳐 약 120만 석에 달하게 되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와는 1565년 다케다 가쓰요리와 노부나가의 양녀(도야마씨의 딸)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었고, 이후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와 신겐의 딸 마쓰히메의 약혼으로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1572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하면서 사실상 동맹은 파기되었다.
2. 6. 서상 작전과 죽음
1568년 음력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며 교토에 입성했으나, 둘 사이는 곧 대립 관계로 돌아섰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제거하기 위해 신겐을 비롯한 여러 다이묘에게 노부나가 토벌을 요청하는 어내서(御内書)를 보냈다.1571년 오다 노부나가가 저지른 히에이잔 엔랴쿠지 방화에 대해 신겐은 노부나가를 "천마(天魔)의 소행"이라고 비난하며 엔랴쿠지를 가이로 옮겨 재건하려 했다. 덴다이좌주였던 각쇼 법친왕(고나라 천황의 동생)도 가이로 망명하여 신겐에게 불법(佛法)의 재흥을 간청했다. 신겐은 각쇼를 보호하고, 그의 추천으로 1572년 곤소조(権僧正)라는 고위 승직을 받았다.
1571년에는 호조 우지마사와 다시 동맹(고소 동맹)을 맺었다. 이를 배경으로 신겐은 1572년 10월 3일,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 요청에 호응하는 형태로 고후를 출발하여 상경(上洛) 작전, 이른바 서상 작전(西上作戦)을 개시했다. 당시 노부나가는 다케다 가문과의 우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우에스기와의 화평을 중재한다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으나[62], 신겐의 군사 행동은 사실상 동맹 파기였다.
다케다 군은 총 3만 명 규모로, 아키야마 노부토모가 이끄는 3천 명은 미노 동부(히가시 미노)로,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5천 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인 미카와로 향했다. 신겐 자신은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2만(호조 가문의 원군 2천 포함 2만 2천)의 본대를 이끌고 아오쿠즈레 고개(青崩峠)를 넘어 도토미로 진격했다.
신겐 본대는 1572년 음력 10월 13일 다다라이 성(只来城), 아마카타 성(天方城), 이치노미야 성(一宮城), 이이다 성(飯田城), 가쿠와 성(各和城), 무카사 성(向笠城) 등 도쿠가와 측의 성들을 단 하루 만에 함락시켰다. 야마카타 마사카게 부대는 가키모토 성(柿本城), 이다이라 성(井平城)을 점령하고 신겐 본대와 합류했다. 아키야마 노부토모 부대는 음력 11월, 노부나가의 숙모인 오쓰야노 가타가 성주로 있던 이와무라 성을 함락시켰다(이와무라 성 전투).
오다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이시야마 혼간지 등과 대치 중이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쿠마 노부모리, 히라테 마사히데 등이 이끄는 3천의 병력만을 지원할 수 있었다. 1572년 음력 10월 14일, 이에야스는 도토미의 히토코토자카(一言坂)에서 다케다 군과 맞섰으나 병력 차와 신겐의 전술에 밀려 패배했다(히토코토자카 전투). 노부나가는 신겐의 행동에 분노하며 우에스기 겐신에게 신겐과의 의절을 선언하는 서신을 보냈다.[63]
1572년 음력 12월 19일, 다케다 군은 도토미의 요충지인 후타마타 성을 함락시켰다(후타마타 성 전투).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하마마쓰성에서 농성하려 했으나, 다케다 군이 하마마쓰 성을 지나쳐 서쪽으로 향하자 1만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1572년 음력 12월 22일,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신겐에게 전술과 병력 면에서 압도당하며 대패했고, 많은 장수를 잃었다(미카타가하라 전투). 이 전투는 신겐의 기병 중심 전술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례이자, 이에야스에게는 최악의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러나 전투 직후, 신겐은 북 오미에 주둔하며 아자이 나가마사를 돕던 동맹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본국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재출병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이노 문서), 요시카게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한 신겐은 오사와 모토타네(大沢基胤)가 지키는 호리에 성(堀江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신겐은 군의 진격을 멈추고 하마나호 북쪽 기슭에서 해를 넘겼다.
1573년 음력 1월, 신겐은 다시 미카와를 침공하여 음력 2월 10일에는 노다 성을 함락시켰다(노다 성 전투).
그러나 노다 성 함락 직후부터 신겐은 자주 객혈하는 등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다케다 군의 진격은 멈추었다. 신겐은 나가시노성에서 요양했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1573년 4월 초 가신들과의 합의 끝에 가이로 철수를 결정했다.
1573년 4월 12일,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시나노 국 고마바(나가노현 시모이나군 아치촌)에서 병사했다. 향년 53세였다. 사인에 대해서는 지병이었던 폐결핵이나 폐렴, 위암 또는 식도암 등의 병사설이 유력하며, 에도 시대의 기록인 아라이 하쿠세키의 《번한보(藩翰譜)》에는 노다 성 공성전 중 입은 총상이 원인이라는 설이, 근대 이후에는 일본주혈흡충증이라는 풍토병 설도 제기되었다.[7][8] 법명은 에린지덴 키잔겐코 다이코지(恵林寺殿機山玄公大居士)이며, 묘소는 야마나시현 고슈시의 에린지(恵林寺)에 있다.[9][10]
신겐이 남긴 지세이(辞世)의 구는 다음과 같다.
>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일본어
> 대체로 땅에 맡겨 살과 뼈가 튼튼하니, 연지 바르지 않아도 스스로 풍류로다.[64]
신겐 사후, 다케다 가쓰요리가 뒤를 이었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게 참패했고, 결국 덴모쿠잔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멸망했다.
3. 유언 및 전설
신겐의 유언에 대해 신뢰할 만한 동시대 사료는 없으며, 후세의 기록이나 이야기 속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널리 알려진 유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가쓰요리에게 남긴 말: "내가 죽은 뒤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하고, 3년간 나의 죽음을 비밀로 하라."
- 야마카타 마사카게에게 남긴 말: "겐시로(源四郎, 야마카타 마사카게를 지칭), 내일은 세다(瀬田; 비와호 남쪽)에 우리 다케다의 깃발을 세워라."
- 공통적으로 알려진 유언: "나의 죽음을 3년간 비밀로 하고, 유해는 갑옷을 입혀 스와호(諏訪湖)에 가라앉혀라."
특히 유해를 스와호에 수장하라는 유언은 『고요군칸』에도 기록되어 있어, 스와호에는 오랫동안 신겐의 수중묘 전설이 전해져 왔다. 1986년, 일본 국토지리원과 해상자위대의 해저 지형 조사 중 호수 바닥에서 약 25m 크기의 마름모꼴 형태가 발견되면서 이 전설이 다시 주목받았다. 이후 신슈 대학, 요미우리 신문, 니혼 텔레비 등 여러 기관이 10여 년간 조사를 벌였고, 전자파 탐지기를 통해 묘로 추정되는 물체를 확인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이 마름모 형태가 호수 바닥의 움푹 팬 지형이 만든 그림자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해당 지형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호수 바닥의 진흙으로 인해 명확한 현지 조사가 어려워 수중묘 전설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많다.
신겐이 사망하자,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우에스기 겐신은 존경하는 적수를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1]
그러나 역사가 홍고 가즈토(本郷和人)는 신겐이 발전된 군사 및 행정 체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이 다케다 가문의 실질적인 번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홍고는 신겐 시대 다케다 가문이 전시 경제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20년간 신슈 정복에 힘쓰고 겐신과 끊임없이 싸웠음에도 확보한 영토의 연간 최대 쌀 생산량은 60만 석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이는 다케다 군의 최대 동원력이 전투당 2만 명 수준에 머물렀음을 의미한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 지방만으로도 연간 65만 석 이상을 생산했고, 부유한 사카이 항구 도시에 접근할 수 있어 신겐보다 훨씬 우수한 군사 기술과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비교했다.[12]
신겐의 능력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평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나왔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가이 국을 장악한 후, 신겐의 정부 및 군사 혁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덴쇼 진고 전쟁 당시,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학살 명령으로부터 다케다 가문의 옛 가신들을 보호했고, 이들은 호조 씨와 우에스기 씨의 침공에 맞서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합류했다. 최소 800명 이상의 다케다 유신(遺臣)들이 도쿠가와 군에 가담하여 호조 씨와 싸웠다.[13] 전쟁 후 이에야스는 이들과 기쇼몬(起請文, 혈서 맹세) 의식을 거행하며 충성을 확보했다.[14][15][16][17]
지휘관 | 예하 부대 (출신 가문) | 병력/특기사항 |
---|---|---|
이이 나오마사 | 츠치야 씨 출신 사무라이 | 70명 (다른 자료에서는 총 120명)[18]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코마이 씨 출신 사무라이 (코마이 마사나오 지휘) | 11명 |
혼다 타다카츠 | 아사리 씨 출신 사무라이 (아사리 마사타네 지휘) | 60명 |
도쿠가와 이에야스 (직속) |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輝) 등 다수 | 하타모토 지위 유지, 영지 수입 증가. 사에구사 마사요시 지위 유지,[19] 사에구사 토라요시 마을 수령 임명.[20] |
역사가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는 이 전쟁의 결과와 다케다 가신들의 흡수가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이에야스를 도요토미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시키고 미래 일본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21]
1585년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히데요시에게 망명하자, 이에야스는 군사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며 신겐의 방식을 핵심으로 채택했다.[22] 그는 토리이 모토타다에게 신겐 시대의 군법과 장비를 수집하도록 명령했고, 다케다 유신 출신인 나루세 마사카즈와 오카베 마사츠나 등을 통해 신겐의 군사 교리를 도쿠가와 군에 전수하도록 했다.[22] 도쿠가와 사천왕이라 불리는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이 새로운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23]
이에야스는 신겐의 유산을 활용하여 장기적인 이익을 얻었다. 1590년 권력 기반을 간토 지방으로 옮겼을 때 설립한 하지오지 센닌 도신(八王子千人同心)은 다케다 유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가이 지방 방어를 담당했으며, 메이지 유신 때까지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다.[24]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 와타나베 다이몬(渡辺大門) 등 역사가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특히 이이 나오마사 휘하 부대를 중심으로 한 다케다 유신들의 편입을 꼽는다.[25][26]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는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쓰요리의 목을 보내왔을 때, 이에야스가 다케다 유신들 앞에서 자신이야말로 신겐의 "정신적 계승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7]
『갑양군감』에 따르면, 신겐은 임종 시 "자신의 죽음을 3년 동안 비밀로 하고 유해를 스와호에 수장할 것", 가쓰요리에 대해서는 "신카쓰의 계승까지 후견인 역할을 하고,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에게 의지할 것"을 남기고, 중신인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히데 등에게 유언을 맡겼으며, 야마가타에게는 "겐시로, 내일은 세다에 (우리 다케다의) 깃발을 꽂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겐의 유언 중 유해를 스와호에 수장한다는 등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으며, 신겐의 묘는 실제로 에이린지에 현존한다.
신겐 사후 가독을 계승한 가쓰요리는 유언을 지켜 신겐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죽음을 비밀로 했다. 코마바의 쵸가쿠지와 고후 이와쿠보의 마엔즈카를 신겐의 화장지로 하는 전승이 있으며, 고후의 엔코인에서는 안영 8년(1779년)에 고후 대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신겐의 법명과 연월의 명문이 있는 관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죽음 직후에 화장하여 유해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도 생각되고 있다.
공식적인 추모 및 장례 절차는 다음과 같다.
- 1575년 3월 6일: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사자가 되어 고야산 성경원에 신겐의 위패를 세움.
- 1575년 4월 12일: 『고요군칸』에 따르면 에이린지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주관으로 신겐의 3주기 불사 거행. 에이린지 주지 카이센 쇼키가 대도사(大導師)를 맡음.
- 1576년 4월 16일: 가쓰요리 주관으로 에이린지에서 신겐의 장례식 거행.
에도 시대 이후의 추모 행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관문 12년(1672년): 에이린지에서 백회 기일 법요 거행.
- 호에이 2년(1705년) 4월 10일: 고후 번주 야나가와 요시야스가 에이린지에서 133회 기일 법요 거행. 신겐을 숭배했던 요시야스는 자신이 다케다 씨와 혈연관계임을 강조하며 전승되는 신겐의 칼 ‘라이코쿠쵸(来国長)’를 봉납함.
- 다이쇼 4년(1915년) 11월 10일: 신겐에게 종삼위 추증.[65]
- 레이와 3년(2021년) 11월 3일: 가이젠코지(고후시)에서 “신겐공 탄생 500년제 대법요” 거행. 신겐으로부터 17대째 당주인 다케다 히데노부(武田英信) 등이 참가.[66]
4. 정책
신겐의 통치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제도가 아니라 합의제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지방 영주(국인)의 영지에 대해 직접 지시를 내리기 어려웠다. "御旗盾無御照覧あれ"(고기盾無고조란아레)라는 말은 합의제의 의장인 다케다 가문 당주의 결정을 의미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영토 확장과 지행제의 보급에 따라 신겐의 통치는 점차 중앙집권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신겐 시대에는 덴쇼 시대부터 정비되어 온 가옥 단위로 부과하는 동별제역이 확립되었고, 영지 장악을 위한 검지도 실시되어 영지 지배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 일환으로 덴문 16년(1547년)에는 분국법인 甲州法度次第를 제정했다. 또한 大小切세법과 甲州금, 甲州되의 甲州삼법을 제정하였다.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인 가이는 고후 분지라는 평야가 있었지만, 가마나시가와와 후에후키가와 두 큰 하천의 잦은 범람으로 경작 가능한 땅이 적어 연공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에 신겐은 다이묘의 권력을 이용해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범람원을 새로운 논밭으로 개발하는 데 힘썼다. 대표적인 예로, 고후 성 아랫마을 정비와 함께 가마나시가와와 고쇼쿠사가와(御勅使川)가 합류하는 류오(현 가이시) 지역에 신겐쓰쓰미(信玄堤)라는 제방을 쌓아 하천의 흐름을 바꾸고 땅을 개간했다.
경제적으로는 일본 최초의 금화인 고이시긴(碁石金)을 주조했다. 가이 지역에는 흑천금산과 유노오쿠금산 등 풍부한 금광이 있었고, 신겐 시대에 이미 활발히 채굴되었다. 남만(포르투갈, 스페인 등)과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새로운 굴착 기술과 제련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막대한 양의 금을 생산했다. 이 금은 치수 사업과 군사비에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의 유력자나 사찰에 대한 선물, 오다 노부나가나 우에스기 겐신에 적대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등 외교적인 목적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다만, 고이시긴은 일반적인 상거래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금광 채굴 역시 다케다 가문이 직접 지배했다기보다는 '금호리슈(金堀衆)'라 불리는 기술자 집단의 권익을 보장해주고 그 대가로 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 정책에 있어서는 사찰 영지의 안정과 기증, 불입권 등 여러 권익을 보장하고 중앙에서 주지를 초빙하거나 법호 수여를 알선하는 등 보호 정책을 펼쳤다. 동시에 사찰의 규율 유지, 전쟁 승리를 위한 기도, 전몰자 추모 등을 의무화하고, 신사에는 신을 섬기는 봉사를 강제하는 등 통제도 병행했다. 신겐 자신도 불교 신자였지만, 특정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영토 내 주민들에게 영향력이 큰 사찰들을 보호함으로써 영토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임제종 사찰인 혜림사를 두텁게 보호하고 다케다 하치만궁의 사전(社殿)을 조성했으며, 나가노의 시나노 젠코지를 고후로 옮겨오도록 권유한 일 등이 알려져 있다.
신겐이 구축한 발전된 군사 교리와 행정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홍고 가즈토(本郷和人)는 그의 노력이 다케다 가문의 번영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신겐 시대 다케다 가문은 전시 경제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으며, 시나노 정복에 20년을 쏟고 우에스기 겐신과 끊임없이 싸웠음에도 확보한 영지의 석고는 연간 최대 60만 석(石)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는 전투당 최대 동원 병력이 2만 명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 지방만으로도 연간 65만 석 이상을 생산했고, 부유한 항구 도시 사카이(堺)에 접근할 수 있어 신겐보다 훨씬 우월한 군사 기술과 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과 비교된다.[12]
하지만 신겐의 능력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찬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나왔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기에 가이를 장악한 후 신겐의 정부 및 군사 혁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째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벌어진 덴쇼 진고 전쟁(天正壬午の乱) 때이다. 당시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분노를 피해 숨어 있던 다케다 가문의 옛 가신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호조 씨(北条氏)와 우에스기 가문이 가이와 시나노를 침공하자 이들 다케다 유신들은 즉시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전쟁 중 최소 800명의 다케다 가신들이 도쿠가와 군에 합류하여 호조 씨와 싸웠다.[13] 전쟁 후 이에야스는 이들과 기쇼몬(起請文, 혈서) 의식을 거행하여 충성을 다짐받았다.[14][15][16][17]
가신 출신 | 인원수 | 지휘관 | 배속 부대 |
---|---|---|---|
츠치야 씨(土屋氏) | 70명 (다른 자료에서는 120명)[18] | - | 이이 나오마사 부대 |
코마이 씨(駒井氏) | 11명 | 코마이 마사나오(駒井政直)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부대 |
아사리 씨(浅利氏) | 60명 | 아사리 마사타네(浅利政胤) | 혼다 타다카츠 부대 |
요다 노부시게(依田信輝)가 이끄는 씨족 등 | 다수 | - | 도쿠가와 이에야스 직속 (하타모토) |
이 과정에서 사에구사 씨(佐久間氏) 등 일부 가신들은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고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수입이 늘어나는 혜택을 받기도 했다.[19][20] 역사가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는 덴쇼 진고 전쟁의 결과, 특히 다케다 가신들의 도쿠가와 군 편입이 단순한 지방 분쟁을 넘어 이에야스를 도요토미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시켜 훗날 일본 통일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21]
둘째는 1585년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히데요시에게 투항한 사건 이후이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씨 군사 정부의 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신겐이 실천한 관료 행정과 군사 교리를 통치의 핵심으로 선택했다.[22] 처음에 이에야스는 가이의 현령으로 근무한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다케다 신겐 시대의 군법, 무기, 군사 장비를 수집하여 하마마쓰 성(浜松城)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그는 전 다케다 가신인 나루세 마사카즈(成瀬正成)와 오카베 마사츠나(岡部正綱)를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의 권한 아래 현령으로 임명했고, 이에야스를 섬기는 모든 전 다케다 가신들에게 다케다 씨 밑에서 근무하는 동안 알게 된 모든 군사 교리와 구조를 전수하라고 명령했다.[22]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소위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총사령관인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에게 이 새로운 군단의 최고 사령관직을 맡겼다.[23]
이에야스가 신겐의 전 가신들로부터 배우고 실천한 통치술은 장기적으로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예를 들어 이에야스가 1590년에 권력 기반을 관동 지방(関東地方)으로 옮겼을 때, 다케다 가신 9개 소씨족의 조각보 같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하지오지 센닌 도신'''(八王子千人同心)과 같은 새로운 관청을 설립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 집단은 이 기간 동안 이에야스를 위해 가이 지방의 방어자로서 도쿠가와 씨를 충실히 섬겼다. 하지오지 센닌 도신은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해산될 때까지 이에야스 사후에도 도쿠가와 씨를 섬겼다.
결론적으로,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와 같은 역사가들은 도쿠가와 씨가 일본을 정복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요인은 특히 그의 장군 이이 나오마사의 지휘 아래 이에야스의 군사 정권에 전 다케다 씨 가신들을 편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25] 와타나베 다이몬(渡辺大門) 교수도 마찬가지로 가이 국의 사무라이가 이에야스의 일본 지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26]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의 일화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의 목을 이에야스에게 보냈을 때, 이에야스는 전 다케다 씨 추종자들 앞에서 그의 목을 보며 가쓰요리는 신겐의 친아들이지만 자신이야말로 신겐의 "정신적 계승자"라고 말했다고 한다.[27]
5. 인물
다케다 신겐의 어릴 적 이름은 "타로"(太郎) 또는 '''가쓰치요'''(勝千代)였다. 성인식 후에는 '''하루노부'''(晴信)라는 정식 이름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막부의 12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이름 한 글자를 받은 것이다. 당시에는 상급 무사가 하급 무사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주는 것이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며, 막부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에도 쇼군의 이름을 받는 것은 지방 영주에게 영광이었다.
다케다씨와 아시카가씨 모두 미나모토씨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하루노부와 그의 조상들은 미나모토(源) 성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하루노부는 조정으로부터 다이젠 다이부(大膳大夫, 궁중 식탁 책임자)라는 관직을 받았을 때 공식 기록에는 "미나모토노 하루노부"(源 晴信)로 기록되었다.
1559년 2월, 하루노부는 출가하여 불교 수행자의 길을 선택했고, 스승으로부터 '''신겐'''(信玄)이라는 법명을 받았다.[2] '신겐(信玄)'의 한자는 '노부하루(信晴)'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이름 '하루노부(晴信)'를 거꾸로 한 것이다. 법명인 신겐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의 공식 이름은 평생 하루노부였다.
신겐은 뛰어난 무용으로 인해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에치고의 용"(越後の龍) 또는 "에치고의 호랑이"(越後の虎)로 불렸다. 이 두 사람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여러 차례 격돌하는 등 숙명의 라이벌 관계였다.[3] 신겐이 죽었을 때, 우에스기 겐신은 가장 강력하고 존경했던 라이벌을 잃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1]
그러나 역사가 홍고 가즈토(本郷和人)는 신겐이 발전된 군사 교리와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이 다케다 가문의 번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홍고는 신겐 시대 다케다 가문이 전시 경제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으며, 20년간의 시나노 정복과 겐신과의 끊임없는 전투에도 불구하고 확보한 영토의 석고가 연간 최대 60만 석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케다 가문의 최대 동원 병력이 전투당 2만 명 수준에 머물렀음을 의미한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 지방만으로도 연간 65만 석 이상을 생산했고, 부유한 항구 도시 사카이에 접근할 수 있어 신겐보다 훨씬 우월한 경제력과 군사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12]
신겐의 능력에 대한 가장 큰 찬사는 그의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나왔다. 이에야스는 혼노지의 변 이후 가이 국을 장악하면서 신겐이 구축했던 정부 및 군사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덴쇼 진고 전쟁 당시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학살 명령으로부터 옛 다케다 가신들을 보호했고, 이들은 호조씨와 우에스기씨의 침공에 맞서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싸웠다 (최소 800명 이상 합류[13]). 전쟁 후 이에야스는 이들과 기쇼몬(起請文, 혈서 맹세) 의식을 통해 충성을 확인받았다.[14][15][16][17] 이후 옛 다케다 가신들은 도쿠가와 군의 핵심 전력으로 편입되었다. 예를 들어, 이이 나오마사 휘하에 츠치야씨 70명(혹은 120명)[18],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휘하에 코마이씨 11명, 혼다 타다카츠 휘하에 아사리씨 60명이 배속되었고, 사에구사씨 등 많은 가신이 하타모토(직속 가신) 등으로 중용되었다.[19][20] 역사가 히라야마 마사루(平山優)는 이 사건이 단순한 지방 분쟁을 넘어, 이에야스를 도요토미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시키고 일본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21]
1585년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이에야스를 배신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투항하자, 이에야스는 군사 시스템을 개혁하면서 신겐의 방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했다.[22] 옛 다케다 가신들에게 신겐 시대의 군사 교리와 제도를 전수하도록 명령하고, 도쿠가와 사천왕이라 불리는 이이 나오마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에게 새로운 군단의 지휘를 맡겼다.[23]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거점을 옮긴 후 설립한 '''하치오지 센닌 도신'''(八王子千人同心)은 옛 다케다 가신들로 구성되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봉사했다.[24] 역사가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와 와타나베 다이몬(渡辺大門) 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옛 다케다 가신들의 흡수를 꼽는다.[25][26]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는 노부나가가 다케다 가쓰요리의 목을 보냈을 때, 이에야스가 옛 다케다 가신들 앞에서 자신이야말로 신겐의 "정신적 계승자"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7]
신겐의 통치는 초기에는 지방 영주들과의 합의제 성격이 강했으나, 영토 확장과 지행제가 정착되면서 점차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변화했다. 신겐은 교토에서 공가를 초청하여 시가회나 연가회를 열었으며, 자신도 뛰어난 시와 한시를 남기는 등 교양인의 면모도 보였다.[68]
에도 시대에는 신겐을 섬긴 24명의 뛰어난 가신들이 우키요에나 분라쿠의 소재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들을 '''다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이라고 부른다. 이들 모두가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다케다 가문을 위해 세운 뛰어난 공적으로 유명하다.
5. 1. 명언
"사람은 성, 사람은 돌담, 사람은 해자, 정은 우리 편, 원수는 적이 된다."- 이 말은 성곽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며, 인정(情)으로 사람들을 결속시켜야 나라가 번영하고, 원수를 만들면 나라가 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신겐은 생전에 가이에 새로운 성을 쌓지 않고 해자 하나뿐인 쓰쓰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에 거주했다. 다만 배후에는 요충지인 세키수이지 성(積翠寺城)이 있어 전형적인 전국 시대 무장의 거관 형태였다. 이 말은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으나 신겐의 이념을 잘 나타낸다고 평가받는다.
"무릇 군의 승리를 5할을 거두면 상(上)이 되고, 7할을 거두면 중(中)이 되고, 10할을 거두면 하(下)가 된다. 5할은 격려를 낳고, 7할은 나태를 낳고, 10할은 교만을 낳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10할의 승리를 얻어 교만이 생기면 다음에는 반드시 패하게 된다. 이는 전쟁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 해당되는 마음가짐이다."
- 이는 지나친 승리가 가져올 수 있는 교만을 경계하는 말이다. 신겐 사후 연승하던 다케다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참패한 것을 보면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이 역시 고요군칸(甲陽軍鑑)의 각색이라는 설도 있다.
5. 2. 풍림화산

: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 難知如陰 動如雷震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는 숲과 같다. 치고 앗을 때는 불같이 하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한다. …… 숨을 때는 어둠 속에 잠긴 듯 하다가도, 움직일 때는 벼락치듯 적에게 손쓸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한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구절에서 유래한 이 문구는 종종 '''풍림화산'''(風林火山)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다케다 신겐은 이것을 자신의 군기(軍旗)로 사용했다. 이 군기는 에린지(恵林寺)의 주지승이었던 가이센 조키(快川紹喜)가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풍림화산 깃발이 유명하여 신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의 가호를 믿었기에, "나무스와낭구 호쇼 카미시모 대명신(南無諏方南宮法性上下大明神)"이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5. 3. 기타
- 가스가 겐스케(春日源介)와 동성애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편지가 남아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남색은 드물지 않았으며, 여성과의 관계보다 고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가스가 겐스케는 후에 가스가 도라쓰나(春日虎綱), 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로 이름을 바꾼다.)
-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신겐은 재가출가를 했음에도 속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엄격한 의미의 불교 계율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는 신겐뿐 아니라 당시 많은 무사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당시 유력 사찰이나 신사의 고위 승려들도 지위를 이용해 부적절한 행위를 하거나 무력 분쟁에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겐은 이러한 종교 세력과 협력 관계를 맺고, 불교를 통해 다른 다이묘를 견제하거나 전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히에이 산의 승려로부터 다이소조이(大僧正位)라는 높은 승려 직위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혼간지의 겐뇨의 부인 뇨슌니(如春尼)와 신겐의 정실 산조노카타(三条の方)는 친자매 관계였다. 이러한 점과 가신들 중에도 출가한 이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신겐 개인뿐 아니라 다케다 가문 자체가 종교 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거성이었던 쓰쓰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에는 자신 전용의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성 뒤편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한 구조로, 신겐이 끈을 당겨 방울을 울리면 전언 게임처럼 배치된 여러 명의 신하에게 알려지고, 상류에 있는 자가 물을 흘리는 방식이었다. 신겐은 이곳을 '산(山)'이라고 불렀는데, 가신이 그 이유를 묻자 "산에는 항상 풀과 나무(草木, 쿠사키 - 냄새(臭き, 쿠사키)와 발음이 같음)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재치있게 답했다고 한다. 이 화장실은 약 6첩(畳) 크기로 넓었으며, 책상과 연적도 갖춰져 있어 용변을 보면서 서신을 쓰거나 작전을 구상하는 서재로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넓은 공간은 적의 습격 시에도 대응하기 위한 대비책이었다고 한다.
- 1564년(에이로쿠 7년)에는 히다 국 내 분쟁에 개입하여 에마 토키모리(江馬時盛)를 지원했다. 이에 맞서 우에스기 씨는 미키 씨(三木氏)와 에마 테루모리(江馬輝盛)를 지원했다. 같은 해 6월, 신겐은 가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와 아마리 마사타다(甘利昌忠)를 히다로 파견하여 미키 씨와 에마 테루모리를 압박했고, 결국 이들은 다케다 측으로 돌아섰다. 8월, 우에스기 겐신(당시 우에스기 데루토라)은 신겐의 히다 침입을 견제하기 위해 가와나카지마로 출진했다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신겐도 나가노 분지 남단의 시오자키 성(塩崎城)까지 진출했으나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고 약 2개월간 대치하다 10월에 양군 모두 철수했다.
-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정실(신겐의 누이)로부터 대량의 조개껍데기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산간 지방인 가이에서 자란 신겐은 이를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개수를 세게 했다. 조개껍데기는 약 2첩 정도의 넓이를 차지했는데, 신겐은 신하들에게 개수를 맞춰보라고 했다. 신하들이 1만 5천 개, 2만 개 등 각기 다른 답을 내놓자, 신겐은 "모두 틀렸다. 3700개 정도다"라고 알려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전투에는 병력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력은 적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5천의 병력을 1만 명처럼 보이게 하고, 병력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너희도 이를 명심하라." 이 말을 들은 신하들은 젊은 군주의 통찰력에 놀랐다고 한다. (《고요군칸》(甲陽軍鑑), 품 제6)
-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고소데(小袖, 평상복)를 선물 받았을 때, 옷이 담겨 있던 칠 상자를 살펴본 일화가 있다. 신겐은 상자를 깨뜨려 옻칠이 여러 번 덧칠된 최고급품임을 확인하고는, 포장에도 고가의 칠 상자를 사용하는 그 정성으로부터 "이것은 오다가의 성의 표현이며, 다케다가에 대한 마음이 진짜다"라고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고요군칸》) 이는 신겐이 사소한 부분에서도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던 세심한 성격을 보여준다.
- 다케다 군의 강함은 널리 알려져, 아들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한 후에도 오다 노부나가의 지배 지역에서 "다케다 군과 우에스기 군의 강함은 천하 제일"이라는 평판이 돌 정도였다. (『야마토 국흥복사련성원 기록』(大和国興福寺蓮成院記録) 덴쇼 10년(1582년) 3월 항)
- 신겐에게 있어 가이에서 교토로 상락(上洛)하는 것은 매우 먼 거리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거점인 미노, 오와리에 비해 가이는 상대적으로 후진 지역이었고 산간 지형으로 인해 행군도 어려웠다. 노부나가가 신겐보다 먼저 상락했을 때, 당시 연가집인 『신선견츠쿠바집』(犬筑波集)에는 "도읍에서 가이로 가는 길은 멀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지리라." (都より甲斐へ赴く道遠し いそぐとも又 日は暮れぬべし)라는 구절이 실리기도 했다.
- 우에스기 겐신을 끝까지 원래 성씨인 '나가오(長尾)'로 불렀다고 한다. 이는 가이의 수호인 다케다 가문과 에치고의 수호대였던 나가오 가문의 격식 차이 때문이었다. 나가오 가게토라가 관동관령직과 함께 우에스기 성씨를 계승하면서 다케다 가문보다 격식이 높아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겐이 인정하지 않고 계속 나가오 씨로 불렀다는 것이다.
-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Historia de Iapam)에서 신겐을 "그(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괴로워하고 항상 두려워했던 적 중 한 명"이라고 기록했다.
- 프로이스는 다른 서간(『일본 예수회 연보』 수록)에서도 신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 "전쟁에서는 유구르타를 닮았다."
- *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항상 승복과 염주를 지녔다. 하루 세 번 우상(불상)에 제사 지냈고, 전쟁터에도 600명의 승려를 동반했다. 이러한 신앙의 목적은 인접한 여러 나라를 빼앗는 데 있다." (이교도인 프로이스의 시각이 반영된 해석)
- * "무력으로 공포의 대상이었고, 부하들로부터 크게 존경받았다. 작은 결점이라도 용서하지 않고 즉시 죽였다."
- 프로이스는 1573년 4월 20일자 서간에서, 신겐이 서상 작전 전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기록했다. 신겐은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기 위해 편지에 "천태좌주 사문(沙門) 신겐" (天台座主沙門信玄|텐다이 자수 샤몬 신겐일본어)이라고 서명했고, 노부나가는 이에 대해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 노부나가" (第六天魔王信長|다이로쿠텐마오 노부나가일본어)라고 답신했다는 것이다. 프로이스는 신겐의 서명을 "천태종 교의의 최고 가문 및 스승 신겐"이라고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1571년 히에이 산 방화 사건 이후 가이로 망명 온 천태좌주 각조 법친왕(覚恕法親王)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의미의 "사문(보호자) 다케다 신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부나가의 답신은 불도를 방해하는 마왕을 자처하며 신겐의 종교적 권위를 조롱한 것으로 해석된다.
-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깃발이 유명하여 신겐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는 《손자병법》의 구절 "그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그 고요함은 숲과 같고, 침략하기는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기는 산과 같다." (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기질여풍 기서여림 침략여화 부동여산중국어)에서 따온 것이다.
- 스와 대명신의 가호를 믿어, "南無諏方南宮法性上下大明神|나무 스와낭구 홋쇼 카미시모 다이묘진일본어"이라는 문구도 깃발에 함께 사용했다.
6. 사인
겐키 4년(1573년) 미카와국으로 진군하여 노다성을 포위하던 중, 신겐의 지병이 악화되었다. 노다 성을 함락시킨 직후부터 자주 객혈하는 등 증세가 심해져 다케다 군의 진격은 중단되었다.[7][8]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 성에서 잠시 요양했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가이로 철수를 결정했다.
1573년 음력 4월 12일, 가이로 돌아가던 중 시나노국 고마바(나가노현 시모이나군 아치촌)에서 병사했다. 다른 기록에는 나미아이나 네바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향년 53세였다.
신겐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지병설: 오랜 지병이었던 폐결핵(결핵)이나 폐렴, 혹은 위암이나 식도암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거론된다.[7][8] 신겐은 상경을 개시할 때도 병이 일시적으로 악화되어 출진 날짜를 연기한 적이 있는 등, 이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총상설: 노다성 전투 중 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저격을 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은 도쿠가와 측 사료인 松平記|일본어 등에만 기록되어 있어, 도쿠가와 가문이 신겐을 전사시킨 것으로 꾸미기 위해 창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 기생충설: 당시 일본의 풍토병이었던 일본 주혈 흡충균 감염으로 인한 체력 저하가 사망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신겐의 법명은 恵林寺殿機山玄公大居士|일본어이며, 묘소는 야마나시현 고슈시에 있는 에린지에 있다.[9][10]
그가 남긴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64]
대체로 땅에 맡기고 살갗 뼈 좋으니 연지를 바르지 않고 스스로 풍류롭다
7. 문화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대결을 소재로 한 비디오 게임 다케다 신겐에서는 다케다 신겐이 주인공으로, 우에스기 겐신이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1960년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영화 《후에후키가와》는 후카자와 시치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다케다 신겐을 위해 싸우는 농민 출신 무사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1969년 영화 《풍림화산》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풍림화산》을 원작으로 하며, 신겐의 군사(軍師)인 야마모토 간스케의 시각을 통해 신겐의 삶을 조명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0년 영화 《카게무샤》는 다케다 신겐의 죽음과 그의 카게무샤(대역 무사)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그렸다. 1990년 영화 《하늘과 땅과》에서는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전투가 극화되었다.
NHK의 타이가 드라마에서는 신겐의 삶이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 1988년에는 닛타 지로의 역사 소설을 바탕으로 나카이 키이치가 주연한 《다케다 신겐》이 방영되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신겐》이라는 제목으로 배포되었다. 2007년에는 야마모토 간스케를 중심으로 신겐의 시대를 그린 《풍림화산》이 방영되었다.
이 외에도 신겐은 다양한 매체에서 등장한다. 1988년 특촬물 시리즈 《세계닌자전 지라이야》 31화에서는 신겐의 유명한 검 노부토라(信虎)가 프랑스에서 발견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디오 게임 《신겐 더 룰러》(일본명: 다케다 신겐 2), 《쇼군: 토탈 워》, 《토탈 워: 쇼군 2》, 《고스트 오브 쓰시마》, 《사무라이 워리어즈》, 《전국 바사라》, 《포켓몬 컨퀘스트》, 《라이즈 오브 킹덤즈》, 《페이트/그랜드 오der》, 《배틀 캣츠》 등 다수의 게임에서 플레이 가능하거나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참프루》의 등장인물 진(Jin)은 도복에 다케다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으며, 《전국 바사라》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30] 라이트 노벨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는 교활한 젊은 여성 다이묘로 등장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 음악 작곡가 우메모토 류(1974~2011)는 다케다 신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29] 애니메이션 《다다미 갤럭시》 10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4.5 다다미 방과 비교하며 "다케다 신겐의 화장실만큼 넓어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매년 4월 첫째 또는 둘째 주말,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는 다케다 신겐의 업적을 기리는 3일간의 신겐공 축제( 信玄公祭り|신겐코 마츠리일본어 )가 열린다. 신겐의 기일인 음력 4월 12일(양력 5월 13일)을 기념하는 이 축제에서는 유명 일본 배우가 다케다 신겐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다케다 신사와 고후성(마이즈루 성 공원) 사이에서 신겐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재현하는 행렬이 펼쳐지며, 참가자들은 1년 내내 연습하여 연극적인 행렬을 선보인다.[31]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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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신겐의 초상화는 동시대의 것이 여러 점 전해진다. 와카야마현 지명원 소장의 『견본착색다케다하루노부상』은 청년기 하루노부가 무사에보시에 나가다루(무가의 정장) 차림을 한 모습이며, 나가다루에는 다케다 가문의 당주이자 가이 슈고임을 나타내는 꽃마름문(하나비시몬)이 그려져 있다. 고야산 성경원 소장의 하세가와 토하쿠가 그린 『견본착색다케다신겐상』(일본 국가 중요문화재)은 장년기의 통통한 모습으로, 상투를 틀고 있으며 와키자시의 비녀와 메누키에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문장인 「두 이끌이문」이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신겐의 정실 산조 부인과 관련된 화가 하세가와 토하쿠가 그렸으며, 신겐 사후 아들 다케다 가쓰요리가 다케다 가문의 보리사인 성경원에 봉납했다고 전해진다.
에도 시대에는 군기(軍記) 문학인 『고요군감』의 영향으로 군배를 들고 붉은 법의와 스와호쇼( 諏訪法性|스와호쇼일본어 ) 투구를 쓴 법사 무장의 이미지가 널리 퍼졌다. 가노 단신이나 야나기사와 기엔(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아들) 등이 그린 신겐 초상화[97]나 다케다 24장도, 가부키나 조루리 연극 『본조24효』, 이를 그린 역자 그림이나 무사 그림 등에서 이러한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편찬한 『집고십종』(1800년 간행)에 성경원본이 '다케다 신겐상'으로 소개되었고, 이것이 교육용 그림 자료로 채택되면서[98] 오늘날 신겐의 일반적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후역 앞이나 시오야마역 앞에 세워진 동상 등도 성경원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후지모토 마사유키는 성경원본 초상화의 인물이 신겐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지적했다.
- 가쓰요리의 편지에는 초상화의 구체적인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 성경원본은 『집고십종』 이전에는 신겐상으로 취급된 기록이 드물며, 『집고십종』 자체에 오류가 많다.
- 신겐의 막내 노부키요의 후손인 요네자와 다케다가의 자료에는 성경원 초상이 신겐의 동생 노부카도(쇼요켄)가 그린 것으로 되어 있어, 하세가와 토하쿠가 그린 현재의 성경원본과 모순된다.
- 39세에 출가하여 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뒤통수에 머리카락이 남아 있다.
- 옷과 칼의 문장이 다케다 가문의 꽃마름문이 아닌 두 이끌이문(아시카가씨 또는 하타케야마씨 문장)이다. 아시카가 쇼군가로부터 하사받았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렇다면 더 격이 높은 오동나무 문장이 사용되었을 것이며, 가문의 문장이 전혀 없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 폐결핵이나 암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는 것과 달리 몸이 매우 통통하다.
- 그림 속의 새는 당시 가이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종류이다.
- 화가 하세가와 토하쿠는 노토국 출신으로, 당시 노토를 떠난 흔적이 없고 신겐과의 접점이 희박하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후지모토는 성경원본의 인물이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의 인물, 특히 하타케야마 요시쓰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조신지 소장 『전 기라 요리야스상』이야말로, 꽃마름문이 많이 그려져 있고 갑옷 묘사 등이 시대에 부합하여, 본래 성경원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노부카도(쇼요켄)가 그린 신겐상의 충실한 모사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99][100] 신겐의 법명 '덕영헌(徳栄軒)'과 하타케야마 요시쓰나의 계명 '흥선원화악'''덕영'''대거사(興禅院華岳'''徳栄'''大居士)'에 '덕영'이라는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가는 점이 후대에 혼동을 일으켰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101][102]
이러한 새로운 주장에 대해 미술사학계에서는 초상화가 그려진 맥락을 고려해야 하며 도상만으로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론도 있으나[103], 후지모토의 설이 설득력을 얻어 최근 일본의 역사 교과서 등에서는 성경원본 대신 지명원본 초상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04]
=== 가문 문장 ===
다케다 가문의 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네 개의 마름모를 합친 형태의 다케다 능형(武田菱)이다. 원래는 와리비시몬(割菱紋)이라 불렸으나, 에도 시대에 그려진 신겐의 초상화 등에서 신겐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사용되면서 '다케다 능형'이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하지만 신겐을 포함한 다케다 가문의 소료(종가 당주)는 실제로는 와리비시몬이 아닌 하나비시몬(花菱紋, 꽃마름문)을 주로 사용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옛 가이국이었던 야마나시현에서는 고후역을 비롯하여 일반 가옥에 이르기까지 다케다 능형 문양을 흔히 볼 수 있다. 야마나시현 경찰 기동대의 장비나, JR 동일본의 특급열차 아즈사, 카이지에 사용되었던 E257계 전동차의 디자인에도 다케다 능형이 채택된 바 있다.
히로시마현립 기온키타 고등학교는 학교 부지가 다케다 가문의 분파인 아키 다케다씨의 거성 사토카나야마성이 있던 다케다산 기슭에 있다는 점에서 교장에 다케다 능형을 사용한다. 같은 히로시마현의 다케다 중학교·고등학교는 아키 다케다씨의 후손이 설립한 학교로, 교장에 다케다 능형을 모델로 한 디자인을 사용하고 있다.
나가노현의 하쿠바 연봉 기슭에 있는 하쿠바 고류 스키장의 명칭 '고류(五竜)'는 다케다 가문의 '고료(御料, 영지)' 또는 '고히시(御菱, 문장)'가 변한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는 눈 녹는 계절에 산기슭에 다케다 능형과 유사한 무늬가 나타나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고류다케 항목 참조.
참고로, 고쿄에서 열리는 신년 일반 참가나 천황탄생일 행사 때 천황과 황족들이 서는 조와덴 베란다 주변에도 다케다 능형과 유사한 문양이 있지만, 이는 예로부터 궁중 가구나 의복에 사용되던 전통 문양으로 다케다 가문과는 관련이 없다(궁내청 홍보 담당자 확인).
=== 후대의 평가 ===
에도 막부 성립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가 낮아진 것과 대조적으로,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괴롭히며 성장시킨 무신(武神)”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이에야스가 신겐의 통치 방식을 참고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막부 역시 '신겐의 신격화'가 곧 '이에야스의 신격화'로 이어진다고 보아 신겐의 인기를 용인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도 시대에는 신겐의 통치와 군략을 다룬 『고요군감』이 널리 읽혔다. 고슈류 군학이 유행했을 뿐 아니라, 『고요군감』을 바탕으로 다케다 가문과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들이 하나의 장르를 이루었다. 또한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막부 직할령(덴료)이 된 가이국에서는 신겐이 다이쇼세키 세법, 고슈킨, 고슈마스 등 독자적인 제도를 창시한 인물로 여겨지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신겐의 이미지는 널리 퍼졌으며, 특히 야마나시현에서는 향토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내무성이 다케다 신사를 별격관폐사로 승격시키는 조건으로 신겐이 천황에게 충성했다는 증거(근왕 행적)를 요구하면서,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 신겐을 근왕가로 해석하려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영웅사관과 황국사관을 배제한 실증적인 연구가 중세사 및 다케다씨 연구에서도 활발해졌다. 1987년 발족한 다케다씨 연구회는 이소가이 마사요시, 우에노 세이로, 사사모토 쇼지, 시바쓰지 슌로쿠, 히라야마 유, 아키야마 게이 등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실증 연구와 관련 사료 간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 산업 구조 변화로 관광이 야마나시현의 주요 산업이 되면서, 신겐은 야마나시현과 고후시 등 지자체 및 민간 기업·단체에 의해 역사 관광 자원이자 지역의 상징적인 인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신겐의 기일(4월 12일) 즈음에는 시대 행렬인 '고슈 군단 출진'을 중심으로 한 도시 축제 신겐공 축제가 열린다. 야마나시의 향토 음식인 호토는 "신겐의 진중식"으로 홍보되고 있으며, 신겐모치, 신겐나베 등 신겐의 이름을 딴 상품도 많다. 나가노현 등 인근 지역을 포함하여 "신겐의 숨겨진 온천"이라고 불리는 온천지도 여럿 존재한다.
관련 시설로는 에린지 내의 '신겐 공 보물관'(고슈시)[105], '고후시 다케다씨 관적 역사관'(애칭 '신겐 뮤지엄')[106] 등이 있다.
=== 관련 작품 ===

다케다 신겐을 소재로 하거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저자 | 출판사 |
---|---|---|
다케다 신겐 | 닛타 지로 | 분게이슌주 |
다케다 신겐 | 쓰모토 요 | 고단샤 |
다케다 신겐 | 도바시 하루오( 土橋治重일본어 ) | 세이미도 출판 |
다케다 삼대기 | 다카노 가쿠잔( 高野楽山일본어 ) | 신진부쓰오라이샤 |
풍림화산 | 이노우에 야스시 | 신초샤 |
하늘과 땅과 | 가이온지 조고로 | 아사히 신문사 |
暮天의 정장 | 이마무라 쇼고 | PHP 연구소 (『전국무장전 동일본편』 수록) |
제목 | 연도 | 제작사 | 원작 | 다케다 신겐 역 |
---|---|---|---|---|
후에후키가와 | 1960년 | 쇼치쿠 | 후카자와 시치로 |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
풍림화산 | 1969년 | 도호, 미후네 프로 | 이노우에 야스시 | 초대 나카무라 킨노스케 |
전국자위대 | 1979년 | 도호,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 한무라 료 | 다나카 히로시 |
카게무샤 | 1980년 | 도호, 구로사와 프로 | - | 나카다이 다쓰야 (1인 2역) |
하늘과 땅과 | 1990년 | 도에이, 가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 가이온지 조고로 | 쓰가와 마사히코 |
제목 | 연도 | 방송사 | 다케다 신겐 역 |
---|---|---|---|
다케다 신겐 (1966년 드라마) | 1966년 | 요미우리 TV | 구라오카 신타로 |
하늘과 땅과 | 1969년 | NHK 타이가 드라마 | 다카하시 고지 |
풍림화산 (1969년 드라마) | 1969년 | NET TV | 오가타 켄 |
여풍림화산 | 1986년 | TBS | 이시다테 데쓰오 |
다케다 신겐 | 1988년 | NHK 대하드라마 | 나카이 키이치 (소년기: 신도 마나토) |
다케다 신겐 (1991년 드라마) | 1991년 | TBS 텔레비전 | 야쿠쇼 코지 |
풍림화산 (1992년 드라마) | 1992년 | 닛폰 TV | 다테 히로시 |
분명 내일은 | 1996년 | NHK 교육 | (다케다 가문의 숨겨진 보물 테마) |
풍림화산 (2006년 드라마) | 2006년 | TV 아사히 | 마쓰오카 마사히로 |
풍림화산 | 2007년 | NHK 대하드라마 | 2대 이치카와 가메지로 (소년기: 이케마쓰 소스케) |
여자 성주 나오토라 | 2017년 | NHK 대하드라마 | 마쓰다이라 켄 |
기린이 온다 | 2020년 | NHK 대하드라마 | 이시바시 료 |
어떡할래 이에야스 | 2023년 | NHK 대하드라마 | 아베 히로시 |
제목 | 작가 | 원작 |
---|---|---|
다케다 신겐 | 요코야마 미쓰테루 | 닛타 지로 |
다케다 신겐 | 사이토 타카오 | 닛타 지로 |
불꽃의 호랑이 신겐 | 나가이 고 | - |
여기서부터 풍림화산 | 야나기하라 만게쓰( 柳原満月일본어 ) | - |
전국 풍림화산 다케다 신겐 | 요코야마 마사미치( 横山まさみち일본어 ) | - |
카이노토라 다케다 신겐 | 고지마 고세키 | 고이케 가즈오 |
제목 | 개발사/퍼블리셔 |
---|---|
전국관동삼국지 | 인텍 |
다케다 신겐 | 에이콤 |
다케다 신겐 | 핫-비 |
다케다 신겐 2 | 핫-비 |
노부나가의 야망 (초대) | (2P측이 다케다 신겐) |
이케멘 전국 ~시간을 달리는 사랑~ | |
페이트/그랜드 오더 | TYPE-MOON |
{| class="wikitable"
|+ 보드 게임
|-
! 제목 !! 제작사 !! 비고
|-
| 신겐 상락 ~바람의 권~ || 츠쿠다호비 || 작전급 (HG-121)
|-
| 관동제압 || 츠쿠다호비 || 하늘과 땅과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켄신 에쓰잔 (우에스기 켄신의 오다와라 포위전), 관동제압 (무사시 마쓰야마성 포위전), 코소우 격돌 미쓰마스토게 (미마세 고개 전투) 포함
|-
| 카이노토라 || 츠쿠다호비 || (HG-130) 우에다하라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
8. 계보
세이와 겐지의 후손인 가와치 겐지 계열의 미나모토 노 요시미쓰(신라사부로 요시미쓰)를 시조로 하는 가이 겐지의 가문이다. 다케다씨는 대대로 가이의 슈고를 역임했으며, 신겐은 다케다 가문의 제19대 당주에 해당한다.
-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 어머니: 오이노카타
구분 | 이름 | 비고 |
---|---|---|
형 | 다케마쓰 | 1517년 ~ 1523년 (요절)[34] |
형 | 이누치요 | 1523년 ~ 1529년 (요절) |
동생 | 다케다 노부시게 | 1525년 ~ 1561년 |
동생 | 다케다 노부모토 | |
동생 | 다케다 노부카도 | 1529년 ~ 1582년 |
동생 | 마쓰오 노부코레 | 1530년대? ~ 1571년 |
동생 | 다케다 소우치 | |
동생 | 가와쿠보 노부사네 | 1530년대? ~ 1575년 |
동생 | 이치죠 노부타쓰 | 1539년? ~ 1582년 |
누이 | 조케이인 | 1519년 ~ 155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결혼 |
누이 | 난쇼인 | 1520년 출생, 아나야마 노부토모와 결혼 |
누이 | 네네 | 1528년 ~ 1543년, 스와 요리시게와 결혼 |
누이 | 카코인 | 우라노 토모히사 부인 |
누이 | 키쿠고료닌 | 키쿠테이 하루스에 부인 |
누이 | 카메고료닌 | 오이 노부타메 부인 |
누이 | (이름 미상) | 시모죠 노부우지 부인 |
누이 | (이름 미상) | 네즈 마사나오 부인 |
신겐의 정실과 측실은 다음과 같다. 사료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되는 인물은 5명이다.
- 정실(正室): 우에스기노카타(우에스기 아사오키의 딸) - 덴몬 2년(1533년) 혼인했으나, 이듬해 출산 중 사망하였다.[32]
- 계실(継室): 산조노카타(산조 긴요리의 딸) - 덴몬 5년(1536년) 혼인하였다.
- 측실(側室):
- 스와 고료닌(스와 요리시게의 딸)
- 네즈 고료닌(네즈 모토나오의 딸)
- 유가와 부인(유가와 노부토모의 딸)
일부 연구에서는 스와 고료닌과 네즈 고료닌은 계실 산죠노카타와는 별도로 혼례를 올린 '별처(別処)', 유가와 부인은 '첩(妾)'으로 보아 신분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07] 또한 네즈 고료닌 소생으로 알려진 다케다 노부키요의 출생 시기가 늦다는 점, 신겐의 칠녀의 생모가 불명확하다는 점 등으로 다른 측실의 존재 가능성도 제기된다.
구분 | 이름 | 생모 | 비고 |
---|---|---|---|
장남 | 다케다 요시노부 | 산조노카타 | |
차남 | 다케다 노부치카 (운노 노부치카) | 산조노카타 | |
삼남 | 다케다 노부유키 | 산조노카타? | 요절 |
사남 | 다케다 가쓰요리 (스와 카츠요리) | 스와 고료닌 | 다케다 가문 20대 당주 |
오남 | 니시나 모리노부 | 유가와 부인 | |
육남 | 가쓰라야마 노부사다 | 유가와 부인 | |
칠남 | 다케다 노부키요 | 네즈 고료닌? | 네즈 고료닌 사후 그녀의 조카딸 소생이라는 설도 있음[108] |
장녀 | 오바이인 | 산조노카타 | 호조 우지마사 정실 |
차녀 | 겐쇼인 | 유가와 부인 | 아나야마 바이세쓰 정실 |
삼녀 | 신류인 | 유가와 부인 | 기소 요시마사 부인 |
사녀 | 마쓰히메 | 산조노카타 | 오다 노부타다와 약혼 |
오녀 | 키쿠히메 | 유가와 부인 | 우에스기 가게카쓰 정실 |
현재 다케다 가문의 후손으로는 사에구사 가(三枝家)가 유명하다.
9. 가신
다케다 이십사장 문서 참고.
'''고요 오명신'''(甲陽五名臣)은 다케다 가문의 아시가루 대장 5명을 가리키며,[109] 주로 다케다 노부토라 시절부터 신겐(하루노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들이다.
이름 | 한자 |
---|---|
오바타 도라모리 | 小幡虎盛 |
하라 도라타네 | 原虎胤 |
다다 미쓰요리 | 多田満頼 |
요코타 다카토시 | 横田高松 |
야마모토 간스케 | 山本勘助 |
'''다케다 사천왕'''(武田四天王)은 신겐 사후 다케다 가쓰요리를 보좌한 4명의 핵심 무장을 일컫는다. 다케다 사천왕 문서 참고.
'''다케다 이십사장'''(武田二十四将)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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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斐」が家康の天下取りを支えた? 戦国最強・武田軍と徳川の深い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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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から家康はすごかった…自分を苦しめてきた難敵・武田勝頼の首を前に徳川家康が放ったひと言【2023上半期BES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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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gen + Groudon – Pokemon Conquest charac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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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goku Basara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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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gen-ko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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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gen-ko Festival" Executive Planning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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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虎のすべ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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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虎 覆される「悪逆無道」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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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氏の国人被官化過程と政権意識
高志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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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中島の戦い
学習研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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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一五五〇年代の東美濃・奥三河情勢-武田氏・今川氏・織田氏・斎藤氏の関係を中心として
戎光祥出版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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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史リブレット人043 武田信玄と毛利元就 思いがけない巨大な勢力圏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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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武田信玄呼称の初見文書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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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史リブレット人043 武田信玄と毛利元就 思いがけない巨大な勢力圏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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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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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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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国期 山内上杉氏の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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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関東計略と西上野支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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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一五五〇年代の東美濃・奥三河情勢-武田氏・今川氏・織田氏・斎藤氏の関係を中心として
戎光祥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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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新編武田信玄のすべて
新人物往来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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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高野山成慶院『甲斐国供養帳』-『過去帳(甲州月牌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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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人としての 武田信玄・今川義元を描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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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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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新研究【NHKカルチャーオンデマンド講座】
https://b2b-ch.inf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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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勝頼の再評価
山梨県韮崎市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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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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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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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妻、三条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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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信玄の妻、三条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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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川氏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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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甲越和与の発掘と越相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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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越相同盟と武田氏の武蔵侵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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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武田信玄と勝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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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戦国大名武田氏の遠江・三河侵攻再考
[62]
서적
信長と将軍義昭―提携から追放、包囲網へ―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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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信長と将軍義昭―提携から追放、包囲網へ―
中央公論新社
[64]
문서
此の世を生きるには、世の中の流れに身を任せるべきなのだ。見せ掛けで生きてはいけない。自分を飾らず本心で生きるのが一番良い事だ。
[6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5-11-10
[66]
웹사이트
武田信玄生誕500年 ファンらが思いをはせる集い 山梨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1-11-07
[67]
논문
戦国大名自筆文書の考察-武田信玄を事例として-
[68]
논문
武田信玄と詩歌会・連歌会
[69]
문서
義信事件から二年後の永禄10年11月、武田義信の正室(今川義元の娘、嶺松院)は、兄である氏真が北条氏を通じて嶺松院を帰国させるよう要請し、のちに娘と共に駿河へ帰国した。今川に戻った嶺松院は出家し、貞春尼と称す。その後、貞春尼は徳川秀忠の御介錯上臈(武家嫡男の教育を取り仕切る女性家老)として徳川家に仕えている。
[70]
문서
歴代古案
https://www.lib.pref[...]
米沢市立図書館
[71]
문서
武田晴信(信玄)願文:富士御室浅間神社所蔵
1557-00-00, 1566-00-00
[72]
논문
北条氏政正室黄梅院殿と北条氏直
武田史研究会
2019-01
[73]
논문
氏康と武田信玄-第一次甲相同盟の展開-
[74]
문서
永禄6年([[1563年]])『笛吹市 二之宮 美和神社所蔵』
https://www.pref.yam[...]
1563-00-00
[75]
논문
武田信玄の人間像
2003
[76]
문서
以自筆染密書候、抑義信者、今川殿之為忘父子之契約候、晴信者五郎殿之為伯父候、其上従長窪以来、至于今度武篇被成候也、数ヶ度顕懇切之筋目候得共、如此等閑者いかさまにも果候、疎候擬不信便候間、今度井上帰国之砌被致直談、此砌従氏康越中之国切無事之扱可然段可被申渡候歟、如何不可過工夫候、爰元にてハ和睦之沙汰態一切停止之可有其心得候、為其以模糊之書状申宣候、謹言、
0000-07-16
[77]
문서
武田氏研究50号 戦国遺文武田氏編 補遺15「武田晴信書状写」「雑録追加」石川県立図書館所蔵
[78]
서적
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2022-07
[79]
문서
飯富兵部少輔所行を以て、信玄・義信の間相妨たぐべき陰謀露見候条、生害を加えられ候。父子間の事は、元来別条無く候。心易かるべく候
[80]
문서
比翼連理(比翼の鳥)。相思相愛の仲や夫婦仲の睦まじい例え。
[81]
서적
信玄の妻―円光院三条夫人
新人物往来社
1990
[82]
문서
元和元年(1615年)「刀八毘沙門天、勝軍地蔵尊縁起」二世明院玄昉
https://bunka.nii.ac[...]
1615-00-00
[83]
서적
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2022-07
[84]
서적
2006
[85]
서적
2006
[86]
서적
2006
[87]
서적
2006
[88]
서적
2006
[89]
서적
2006
[90]
서적
2006
[91]
서적
山梨県史 通史編2 中世
[92]
서적
2006
[93]
논문
知られざる戦国武将の「健康術と医療」
[94]
뉴스
【独自】信玄のまわりに家臣88人ずらり…24人が一般的だが「類例のない構図」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1-11-04
[95]
서적
トリビアの泉〜へぇの本〜 3
講談社
[96]
서적
戦国大名と外様国衆
文献出版
[97]
문서
信玄没後百五十回忌に吉里が奉納した。
[98]
논문
信玄伝説 由緒と図像
山梨県立博物館
2006
[99]
문서
例えば、東京大学史料編纂所所蔵の模本
https://web.archive.[...]
[100]
서적
武田信玄像の謎
吉川弘文館
[101]
논문
土佐家伝来の伝足利義政像について
2012-09
[102]
문서
なお同論文では、像主が畠山徳栄であると共に、切り取られたという賛の筆者が徳栄だった可能性を指摘している。
[103]
논문
長谷川等伯─信春時代における諸問題
[104]
문서
なお同論文は、近年の武田氏研究を総括し、今後の課題を述べている。
[105]
웹사이트
信玄公宝物館
http://shingen.iooo.[...]
2019-04-13
[106]
웹사이트
甲府市武田氏館跡(やかたあと)歴史館(平成31年4月5日オープン)
https://www.city.kof[...]
甲府市ホームページ
2019-04-13
[107]
서적
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2022-07
[108]
서적
武田信玄の妻、三条殿
東京堂出版
2022-07
[109]
문서
잡병으로 졸병을 뜻한다. 아시가루란 말은 발놀림을 가볍게 해 달리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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